민수기 19장 [열기]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심이 선포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부정함은 용서되지 않고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다. 진 가운데 성막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많은 사유로 부정하게 되면 반드시 정하게 하는 몇가지 절차를 따라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에게서 제해지게 된다(아마 이 말은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부정한지는 누가 가르쳐주는 것일까? 위의 말씀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죽어있는 장막에 공공연히 들어간다던가, 여럿이 동행하는 중에 길에서 시체를 만진다던가 하면 주위에서 너는 부정하다 라고 말해줄 수 있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아무도 모를만한 상황도 심심찮게 있을 것이다. 내가 부정한지 아무도 모르는데, 7일간 부정을 떨어내는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를 하고 싶을까?
부정을 입었을 때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단절되는 관계를 다시 회복하느냐 버려지느냐의 문제이지, 하고 싶으면 하고, 누가 알면 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율법의 절차와 제사가 없어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죄를 죄되게 하는 말씀이 남아있고, 죄가 잠시 우리에게 머물수도 있다. 죄에서 자유롭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부정하게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스스로 정결케 하지 않는다면 백성에게서 끊쳐질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죄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수동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대속하셨으니까, 하고 안심하고 죄를 짓고 짓고 또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만큼이나 용서를 구하고 정결케 하는 것도 능동적이 되어야 한다.

정결케 해야하는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나를 위함이 아닌 타인을 위함이다. 말씀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과 제물을 태운 사람과 재를 긁어모은 사람도 부정하거니와 부정한 사람이 만진 모든 물건이 부정하고, 그 물건을 만진 사람도 부정하다고 했다. 마치 전염병의 보균자처럼 그 사람이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부정이 퍼져나오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정결케 하지 않는다면 부지불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부정을 옮게될 수 밖에 없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을 동정하여 재워주고 먹여주었더니 범인 은닉이 되버리거나 공범이 되버리는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죄의 결과가 반드시 나에게서 끝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하나님에게서 떨쳐지지 않도록, 백성에게서 끊쳐지지 않도록, 몸가짐을 삼가고 부끄러움이나 귀찮음을 인하여, 헛된 자신감을 인하여 회개하지 않고 랄랄라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10/08/24 22:07 2010/08/24 22:07

민수기 18장 열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에서 레위지파의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지정해주셨다. 그들은 비록 나눠받은 땅도, 재산도 없었지만, 성막에서 봉사하며 민족이 드리는 제물이 그들의 것이 되었다. 성막에서 봉사한다는 것, 제물을 먹는다는 것, 이러한 점들은 선민 의식을 뿌리깊게 가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부러움의 대상이고 권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권력은 개개인이 성소가 된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로는 아론과 그의 족속은 성소의 죄와 제사장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민족 가운데서 일어나는 죄는 대부분 개인에게 속하거나 민족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소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소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일어나는 죄는 민족에게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고, 제사장이 없을 경우 백성의 죄까지 속죄받지 못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기에 보다 엄격하고 책임있게 그들 스스로를 단속하고 정결하게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이 성소의 직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진노가 민족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제사장과 성소의 봉사자들에게 맡겨진 책무는 단순히 그들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민족의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그른 길로 가고 있다면 그 책임은 성소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목회자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진지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자기 좋을대로 전하기도 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설교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비단 이단, 사이비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과연 그들은 성소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성소에 둔 것이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민족에게 선물로 주어 봉사하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제사장의 직분도 그들에게 준 선물이라고 하셨다. 자신들의 위치를 바로 알고 바로 행해야 할 것이다.
2010/05/14 08:43 2010/05/14 08:43

민수기 17장 [열기]



반역이 있은 후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또다른 기적을 준비하셨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바로 그것이다. 지팡이란 노인들의 거동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왕의 홀과 같이 지닌 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12 부족을 대표하는 12 족장을 대표하는 12 지팡이를 통해 그 중에서도 으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셨다.

이 기적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결정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덤볐던 자신들의 앞 일을 두려워했다. 적어도 하나님을 대변하는 그들의 지위에는 두 번 다시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여주심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회의주의가 관영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모습이다.

하도 속임이 많은 시대이고, 말과 행동의 일관성은 커녕 시간과 상황에 따라 말의 일관성조차 없는 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보니 의심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도 의심부터 해보는 것이 신중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말의 속내는 다르지 않을까 섣불리 추측해보기도 한다.

저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났으면 어떨까? 인터넷에는 밤새 바꿔치기 했을거라던가, 접붙임일거라는 이야기도 떠돌테고, 지팡이에 씨를 심어 싹이 나게 하는 방법들이 포스팅될지도 모른다. 밤새 돌아가는 카메라를 설치한 후에 다시 한번 해보자고 할지도 모르고, 음모론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어찌되든 있는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믿은 자를 말씀하셨지만, 생각해보면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게 우리 아니던가. 그 수많은 기적에도 하나님을 떠났던 구약의 많은 사람들과, 그 놀라운 가르침에도 새벽부터 몰려와 저주를 퍼부었던 신약의 유대인들과, 그 많은 증거들에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얄팍한 믿음에 의심의 자리를 주지 않아야겠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실터이니 - 그렇더라도 분별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고, 분별해야할 것은 분별하며 - 헛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의심들은 버리자.
2009/09/15 14:22 2009/09/15 14:22

민수기 16장 [열기]



이 말씀은 묵상하기 참 난감한 말씀이다. 드러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권위인데, 개인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이 말씀을 보며 어떤 묵상을 했을지 궁금하다. 물론, 모세와 아론은 타락한 지도자들도 아니었지만, 타락의 기준이 본래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니만치, 자신이 고라와 다단은 아닌지 성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나 역시 한국 개신교의 기득권층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지나치게 지도자 편향적으로 도당을 맺는 크리스쳔들을 염려하지만, 목사들의 말씀이 순전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하기에 때로 스스로의 정의감에 취한 고라의 모습이 아닌가 저어 걱정스럽긴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군중의 비판을 받는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다. 역사로 보건대 모세와 아론은 정직했고, 억울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대표했으며, 그들 중 높았다. 우리의 지도자들 역시 그러한가?

당시는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성막의 휘장이 찢기워지며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고 백성이고 아들이 되었다. 예수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에게 부탁하여 소원을 구하고, 누구를 통하여 응답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딸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자유를 얻었으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무리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지 말라셨음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구차한 핑계일런지도 모르지만.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세 시대나 다윗 시대와의 지도자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시대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미리 알려주셨듯 지도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총회 위에 서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모세가 아닌 한. 마땅히 총회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자신이 섬겨지길 원하는지 돌아보아야 하고, 성도는 지도자를 섬기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와 평신도가 서로 섬기는 교회,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 시대에 원하시는 모임의 모습이 아닐까.
2009/09/14 14:59 2009/09/14 14:59

민수기 15장 [열기]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 1세대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리라는 결정을 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드려야하는 제사의 예물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무시무시한 결정 뒤에 따르는 말이 얼핏 보면 잔인한 것 같지만, 이것들은 1세대들이 기억하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규칙들이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수없이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은 늘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일탈했으며, 처벌을 받곤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소중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설령 자신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또 후손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죽을지라도, 신앙은 대를 이어 내려가야 하는 것이고, 믿음은 끊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1세대들에게의 가르침을 통해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신다.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후손들의 나라를 위해 기대감을 규칙과 함께 전달하게 된다. 그럼으로 믿음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힘들고 지키기 어려운 규칙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좀 더 수월해진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제사 절차들을 기억하고 지키며 가나안 땅의 미래를 기대했던 것처럼,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우리를 어려운 성경의 규칙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편하게 지킬 수 있게 해준다.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해내는 기대, 그리스도인의 자랑스러운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2007/10/24 12:00 2007/10/2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