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장'에 해당되는 글 134건

  1. 2009년 09월 15일 [一日一章] 134. 의심을 버리자
  2. 2009년 09월 14일 [一日一章] 133. 권위
  3. 2007년 10월 24일 [一日一章] 132. 기대
  4. 2007년 10월 23일 [一日一章] 131. 책임
  5. 2007년 10월 22일 [一日一章] 130. 역사는 기억한다
  6. 2007년 10월 21일 [一日一章] 129. 권력
  7. 2007년 10월 20일 [一日一章] 128. 인간의 한계
  8. 2007년 10월 19일 [一日一章] 127. 기억
  9. 2007년 10월 18일 [一日一章] 126. 나설 때와 나서지 말 때
  10. 2007년 10월 17일 [一日一章] 125. 봉사의 법칙

민수기 17장 [열기]



반역이 있은 후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또다른 기적을 준비하셨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바로 그것이다. 지팡이란 노인들의 거동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왕의 홀과 같이 지닌 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12 부족을 대표하는 12 족장을 대표하는 12 지팡이를 통해 그 중에서도 으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셨다.

이 기적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결정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덤볐던 자신들의 앞 일을 두려워했다. 적어도 하나님을 대변하는 그들의 지위에는 두 번 다시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여주심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회의주의가 관영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모습이다.

하도 속임이 많은 시대이고, 말과 행동의 일관성은 커녕 시간과 상황에 따라 말의 일관성조차 없는 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보니 의심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도 의심부터 해보는 것이 신중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말의 속내는 다르지 않을까 섣불리 추측해보기도 한다.

저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났으면 어떨까? 인터넷에는 밤새 바꿔치기 했을거라던가, 접붙임일거라는 이야기도 떠돌테고, 지팡이에 씨를 심어 싹이 나게 하는 방법들이 포스팅될지도 모른다. 밤새 돌아가는 카메라를 설치한 후에 다시 한번 해보자고 할지도 모르고, 음모론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어찌되든 있는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믿은 자를 말씀하셨지만, 생각해보면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게 우리 아니던가. 그 수많은 기적에도 하나님을 떠났던 구약의 많은 사람들과, 그 놀라운 가르침에도 새벽부터 몰려와 저주를 퍼부었던 신약의 유대인들과, 그 많은 증거들에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얄팍한 믿음에 의심의 자리를 주지 않아야겠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실터이니 - 그렇더라도 분별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고, 분별해야할 것은 분별하며 - 헛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의심들은 버리자.
09 15, 2009 14:22 09 15, 200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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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133. 권위

from 천국의 꿈 09 14, 2009 14:59

민수기 16장 [열기]



이 말씀은 묵상하기 참 난감한 말씀이다. 드러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권위인데, 개인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이 말씀을 보며 어떤 묵상을 했을지 궁금하다. 물론, 모세와 아론은 타락한 지도자들도 아니었지만, 타락의 기준이 본래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니만치, 자신이 고라와 다단은 아닌지 성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나 역시 한국 개신교의 기득권층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지나치게 지도자 편향적으로 도당을 맺는 크리스쳔들을 염려하지만, 목사들의 말씀이 순전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하기에 때로 스스로의 정의감에 취한 고라의 모습이 아닌가 저어 걱정스럽긴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군중의 비판을 받는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다. 역사로 보건대 모세와 아론은 정직했고, 억울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대표했으며, 그들 중 높았다. 우리의 지도자들 역시 그러한가?

당시는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성막의 휘장이 찢기워지며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고 백성이고 아들이 되었다. 예수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에게 부탁하여 소원을 구하고, 누구를 통하여 응답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딸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자유를 얻었으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무리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지 말라셨음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구차한 핑계일런지도 모르지만.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세 시대나 다윗 시대와의 지도자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시대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미리 알려주셨듯 지도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총회 위에 서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모세가 아닌 한. 마땅히 총회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자신이 섬겨지길 원하는지 돌아보아야 하고, 성도는 지도자를 섬기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와 평신도가 서로 섬기는 교회,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 시대에 원하시는 모임의 모습이 아닐까.
09 14, 2009 14:59 09 14, 20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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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132. 기대

from 천국의 꿈 10 24, 2007 12:00

민수기 15장 [열기]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 1세대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리라는 결정을 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드려야하는 제사의 예물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무시무시한 결정 뒤에 따르는 말이 얼핏 보면 잔인한 것 같지만, 이것들은 1세대들이 기억하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규칙들이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수없이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은 늘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일탈했으며, 처벌을 받곤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소중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설령 자신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또 후손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죽을지라도, 신앙은 대를 이어 내려가야 하는 것이고, 믿음은 끊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1세대들에게의 가르침을 통해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신다.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후손들의 나라를 위해 기대감을 규칙과 함께 전달하게 된다. 그럼으로 믿음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힘들고 지키기 어려운 규칙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좀 더 수월해진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제사 절차들을 기억하고 지키며 가나안 땅의 미래를 기대했던 것처럼,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우리를 어려운 성경의 규칙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편하게 지킬 수 있게 해준다.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해내는 기대, 그리스도인의 자랑스러운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10 24, 2007 12:00 10 24,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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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131. 책임

from 천국의 꿈 10 23, 2007 12:00

민수기 14장 [열기]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이집트를 나와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했던 불평을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이집트에서 나오게 했는가,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죽으리라, 모세는 필요없다,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은 커녕 멸시와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한 의미없는 분노 앞에 모세와 아론은 잘못도 없이 자복하였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보다못한 하나님께서 직접 판결하셨다.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단 한사람도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그 뿐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죽고 말 것이라고 정하셨다. 하지만, 정하신 뜻을 돌이키시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가 행하면 다시 돌이키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나안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결과는 뻔했지만.

성인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할복을 하는 사무라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인간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하나님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터인데, 자신들의 목숨이 아까워 자신들 멋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결정하고 행동했다.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에 대해서만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데에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도 가르쳐준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많은 것들을 교회에서의 삶에만 적용시키곤 한다. 이제 우리가 가져야할 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삶의 세상적인 적용이다. 세상과 교회에서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10 23, 2007 12:00 10 23,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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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3장 [열기]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기독교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거대한 아낙 자손들과 12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10명의 정탐꾼과 그로 인해 40여년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던 이스라엘 자손들 이야기.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일이 없다는 훌륭한 교훈을 알려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기억하겠지만, 나머지 열 정탐꾼의 이름은 기억은 커녕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가물하기도 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미혹하여 40여년이나 방황하게 만들고, 출애굽 1세대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만든 열 명의 정탐꾼. 우리는 비록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이들을 열 명의 정탐꾼으로만 기억하지만, 성경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기록에 있어서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의 실수는 우리 스스로의 위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우리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의 옳고 그름을 전해준다. 그러니 잘 판단해야할 것이다. 한번의 선택이 역사에 길이 남아 그릇됨의 표상으로 전해지는 열 정탐꾼들처럼, 그렇게 남지 않기 위해서는...
10 22, 2007 12:00 10 22,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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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129. 권력

from 천국의 꿈 10 21, 2007 12:00

민수기 12장 [열기]



권력이란 매우 달콤하다. 한번 이 맛을 보게 되면 마약처럼 중독되어 찾게 되어 있다. 명철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권력이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권력자들은 자신이 어떤 권력자들 - 대체로 그들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 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권력자들 - 대체로 그들보다 낮거나 비슷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 - 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가진 권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데도 말이다.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고, 칠십인의 장로들을 통해 예언하시기도 하셨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니, 그들의 콧대가 한껏 높아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어느덧 그들의 일부는 자신이 모세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리라. 점점 모세의 지도에 대한 불만을 마음속에 쌓아두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아론과 미리암이 그 불만을 터트리기에 이른다.

하나님은 깔끔하게 선을 그어주신다. 많은 선지자나 대언자들과 모세는 다르다라고. 모세에게 허용되는 많은 일들이 선지자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많은 타락한 대언자들에게 해당하는 비난의 말들이 모세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왕자를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뿐이라는 것을 과감하게 말씀하신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

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매우 유혹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권력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마치 가진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선지자이고 대언자이면서도 마치 하나님과 대면한 모세와 같은 양, 하나님의 권력을 넘치도록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권력에 취해 멋대로 굴다보면 영혼은 나병에 걸려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스스로 획득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수준이 일정 정도를 넘어서거나, 특별한 자격을 얻으면, 마치 모세나 된 양 행하는 이들이 안쓰럽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히려 부족한 그들이 못내 안타깝다. 그리고 그 뒤를 좇으며 그릇된 길로 가는 어린 양들이 불쌍하다.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겸손하자.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했던 모세처럼.
10 21, 2007 12:00 10 21,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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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장 [열기]



크리스쳔은 단순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가진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크리스쳔이라는 말은 그의 삶과 모든 사고방식의 기준이 하나님으로 바뀐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사고방식의 기준이 하나님으로 바뀐다는 것은 모든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고, 모든 행동의 결과는 하나님을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신앙인의 삶의 기준을 현실에 두고, 우리의 행동을 현실로 제한하곤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도 배부르게 먹고 살고 있었다. 많은 제사와 잦은 이동으로 인해 가축을 잡을수는 없었지만, 날마다 내려주시는 만나 덕분에 굶주릴 일이 없었다. 그런데, 배부르고 등따시우니 욕심이 생기는건지, 난데없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다. 그냥 고기가 먹고 싶어요, 하고 투정만 했으면 좋을텐데, 그만 차라리 이집트에 있을걸 하는 후회까지 내뱉어버렸다. 이 말을 들은 모세의 심정이 저리 안좋을진대,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모세마저도 차라리 죽여달라고 반 협박을 하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실만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왕 수고를 무릅쓰고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고, 돌보아주었으니, 그까짓 고기 한번 못주랴 하시는 마음에 한달동안 질리게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메추라기를 가득 보내주셨다.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겠다고 하셨고, 실제로 모든 히브리인이 먹고도 넘치도록 주셨는데, 이 악한 사람들은 혹여 하나님이 어느 순간 끊으실까, 혹시 내일 되면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여 분에 넘치도록 메추라기를 거둬들여 사방에 널어놓았다. 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인가. 만나를 다음날까지 두면 썩어버리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면 주시는 것을 알고 있고 이미 겪었던 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가득 찬 하나님의 노가 터지지 않을 수 있으랴. 결국 하나님은 몇 사람을 희생시켜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인간의 이해 영역은 굉장히 작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현실에 맞추어 생각하려니 그 뜻과 계획이 굉장히 축소되고 삭제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대강이나마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신의 이해를 위해 하나님을 제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한계를 넘는 영역에 대해 그저 믿고 받아들이는 것.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분수에 맞는 판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좁디좁은 마음 안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광활한 하나님의 마음 안에 두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계를 넘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고기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10 20, 2007 12:00 10 20,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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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127. 기억

from 천국의 꿈 10 19, 2007 12:00

민수기 10장 [열기]



길이나 여타 장소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마주치거나, 모임에서 만났을 때,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경우를 겪어봤을 것이다. 혹은 나는 알고 있는 사람이라 아는 척을 했더니만 상대쪽에서 애매한 반응을 보이거나,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길래 봤더니만 잘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경우도 겪어봤을 수 있다. 기억이라는 것은 상호배타적이라 어느 한 편의 기억만을 가지고는 소용없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이처럼 관계에서의 기억이 더욱 그러하다. 아는 사람이라 친한 척 했더니만,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뻘쭘한 상황인가.

하나님은 구약에서 종종, 우리가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평소에는 잊고 계시다가 부르짖을 때에서야, 아 참... 하고 기억하신다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마음과 행위를 감찰하신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유효한 기억은 양 편에서 모두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정말 유효한 기억은, 기억을 서로 확인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상대방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내 기억 여부를 알 수 없고, 결국 기억은 쓸모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아는 척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기억과 우리의 기억이 합일되기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는지 한번 확인해봐라, 고 하시는 것이다.

이따금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나팔을 불어본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고, 여전히 우리를 위한 도움과 은혜를 준비해놓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믿음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관계는 확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확인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확신하게 해줄 것이다.
10 19, 2007 12:00 10 19,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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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9장 [열기]



사람이 정하든, 사람에게 주어지든, 사람이 살아가는데에는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규칙을 모든 사람이 밝히 알고 명확히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에는 지도자도 있고, 재판관도 있는 것이다. 혼자서 살아간다면 제 옳은 생각대로 살아가면 되겠지만, 누군가와 얽혀 살아간다면 공동의 규칙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이 장에서는 두가지 이야기를 보여준다. 적극적으로 규칙에 대응하는 이야기 하나와 순종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이야기 하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통해 규칙은 지켜져야 하고, 규칙은 삶의 더 넓은 부분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행함으로 규칙은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집트를 나와 광야에서 떠돌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살아가다보니 정결해야할 때에 불가피하게 정결을 지키지 못한, 선행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월절이 무엇인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의 기적을 아직 기억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유월절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사실로 만드는 증거이고 약속이 아닌가. 그렇기에 불가피한 이유로 유월절을 함께 드리지 못하는 소외감을 참을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예외사항에 대한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규칙을 요구했다.

결국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월절을 함께 드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규칙을 정해주셨고, 민족에게서 소외되었을 이들이 그 다음달의 유월절을 통해 민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유월절을 함께 드리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리에서 고립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진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진 안에 성막이 세워진 이후, 성막에는 구름이 내려오거나, 불이 성막 위에 있곤 했다. 마치 이집트를 막 나왔을때, 홍해로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진 한가운데의 구름과 불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보호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구름과 불의 모습이 하나의 규칙이었다. 이들은 규칙을 만들어내거나 이끌지 않았다. 그들이 이동하려고 하면 구름이 올라가고, 그들이 머무려고 하면 구름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며, 구름이 올라가면 이동하고, 내려오면 멈추었다. 주어진 규칙을 지키고 바꾸지 않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규칙에 이의를 제기할때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위태해질때여야 한다. 우리는 규칙을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때때로 스스로를 위해 규칙을 어기고, 무시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해버린다. 그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고, 하나님의 진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말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규칙이 바로 그것이다.

10 18, 2007 12:00 10 18, 20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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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8장 [열기]



대학에 들어가면서 선교단체에 들어가고, 청년부로 올라가서 처음 교회 봉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 재미와 열정에 푹 빠져, 주말 내내 교회에서 보내던 때가 있었다. 봉사의 의미도, 마음가짐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부르는 곳이 있으면 달려갔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혔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하면 마라톤 완주는 커녕 1/3도 못가 지쳐 쓰러져버리는 것처럼, 결국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깡으로 버티고, 억지로 하는 것은 안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봉사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그 쉼이 너무 길어 문제이지만, 그 결정이 옳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되돌아봄과 재다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레위인은 하나님께 드려져, 회막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청년시절과 장년시절, 원기가 왕성하고 열정이 넘치는 시간들은 하나님을 위해 드려져야 했고, 이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했다. 하지만, 레위인이라는 혈연관계만으로 무조건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먼저 거룩하게 성결되고, 속죄된 후에야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봉사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고, 몸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왜 해야하는지를 먼저 알고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에 임하는 마음이 먹고 살기 위해 싫어도 직장을 다니는 셀러리맨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시고, 부름 받았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먼저 가져야할 마음도 여느 세상 일과는 다르다. 앞집에 놀러가듯 예배에 나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용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듯 봉사거리를 구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10 17, 2007 12:13 10 17, 200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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