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장 [열기]



이스라엘이 죽자 요셉은 그 형제들과 함께 장사를 지내기 위해 가나안의 막벨라 굴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때에 애굽의 주요 인사와 원로들이 함께 올라가는 것이었다. 총리의 아버지이니 각계의 인사들이 문상을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지금처럼 인근 병원에서 상을 치르는 것이 아닌 시대이니 가나안까지 같이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자리에서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히브리인이고, 업신여기는 목축하는 이를 이리도 높이는 것은 그만큼 요셉이 애굽에 끼친 영향이 크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온 후 보여준 모습이 훌륭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상 이스라엘이 죽자 몸이 다는 것은 요셉의 형제들이었다. 여태까지는 아버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셉이 함부로 할래야 할 수가 없었을테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제는 요셉을 막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아닌가. 그리하여 형제들은 아직 슬픔에 잠겨있는 요셉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셉은 이미 형제들에게 그 정체를 드러냈을때에 그들을 용서하였었다. 그들에게 복수할 권력도 이유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운 요셉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지금에 와서도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창세기를 가로지르는 가르침이 이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하나님의 마음을 베푸는 것, 하나님의 계획 안에 그 자신을 밀어넣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위해 정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셉의 삶이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고 성경은 요셉의 삶을 통해 창세기의 주제를 말씀하시며 그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를 마무리한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약속을 배우고, 신실하심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 사람의 나약함과 악함과 이기심과 욕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후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것이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생을 통해 이뤄내어야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성경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것임을 이제 알 수 있다. 이제, 그 역사를 짚어보며 함께 그 삶을 살아내보자.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2007/08/03 17:45 2007/08/03 17:45

창세기 49장 [열기]



이스라엘은 그와 함께 살지 않았던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 후, 마지막 때에 그의 열 두 아들들을 축복한다. 이 축복은 중동지방,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보았을때에는 상당히 의아스러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장자권을 받게 된 유다와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좋은 것으로 가득 복을 빌어주면서 시므온과 레위에 이르러서는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성경은 각자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하다.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백만원씩 버는 우리의 형편이 고달프다고 한탄하기 일쑤다. 언제나 자신의 일이 가장 힘들고, 자신의 형편이 가장 어렵다. 기준은 언제나 자신이지만, 기준 자체가 밑바닥 기준이라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데다가, 우리는 위를 볼 줄만 알지, 밑을 보며 반성할 줄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과 여건은 각자의 분량대로 나눠 주신 것이다. 먹고 살만큼, 쓸 수 있는 만큼 부를 주신다. 일을 할 수 있을만큼 능력을 주시며, 일을 주신다. 우리가 불평인 것은 우리의 분량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평만 하지 말고, 받은 것에 순응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야곱의 축복을 통해 성경은 말씀하신다.

누구나 유다가 받은 복을 원하며, 요셉의 복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레위가 되어야 하며, 누군가는 납달리가 되어야 한다. 단이 있으므로 아셀이 있고, 잇사갈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 유다의 복을 받으면 왕은 많겠지만, 제사장은 누가 한단 말인가.

자신을 알고 그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태엽 안에서 바른 톱니가 되는 것. 그것이 야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의 유언이 축복인 이유이다.

2007/08/02 17:08 2007/08/02 17:08

창세기 48장 [열기]



열 손가락 중에 안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서도 실상은 열 손가락 중 더 자주 쓰거나, 더 이쁘거나, 더 마음이 가는 손가락은 있는 법이다. 다 똑같이 배아파 낳은 자식일진대 누구가 더 귀하고 누구가 덜 귀한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냐지만, 그런 것도 있다.

이 이야기는 요셉을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나이가 많아 죽을때가 가까워오자 요셉이 그 아들들을 데리고 문병을 온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상기하며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도 그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다. 어쩌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나 자신의 장자가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어짐이 캐낼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일평생 에서를 인하여,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인하여, 라헬을 인하여, 그리고 요셉을 인하여 마음 고생만 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 그의 생애를 통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반드시 그 민족이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일부분 예언적인 성격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아들로 넣어 가나안으로 올라가 땅을 나눠가질 때에 요셉의 후손이 땅을 더 많이 갖게 되리라고 한다. 요셉에 대한 지극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며, 서투르게 판단해서도 안될 일이다. 성경을 해석할때에는 자의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요령있게 돌려 맞춰도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거나 쓰임을 받는 사람은 있다. 비단 범한 죄가 커서 받을 은혜가 큰 경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더 적극적이고 더 애교 넘치는 사랑을 보내는 사람도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짝사랑을 마음 깊숙이 갈무리한채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사람보다는 꽃과 선물을 보내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쪽이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동시에 수억경의 생명체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하나님에게도 조금은 더 눈에 뜨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되돌려드리는 사랑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베드로처럼 더 적극적인 경우에 더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칭찬할 거리가 있어야 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있는지 어떤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만,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싶다.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2007/08/01 16:23 2007/08/01 16:23

창세기 47장 [열기]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요셉에 의해 바로 앞으로 불려나간다. 바로를 대면한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자기의 생애 이야기를 통해 간략하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바로를 축복한다. 이미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바로는 자신이 좋게 여기는 요셉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축복 또한 좋게 받아들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모든 종교와 사회 현상을 통털어, 전능자에게서 구원을 거저받는 하나님의 소식만큼 크고 기쁘고 즐거운 것은 없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행도 훈련도 댓가도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것, 그 뿐이다. 이것보다 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더 빠르게 얻는 길도 없다. 그야말로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이 복된 소식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고 시끄러운 쇳소리로 여기거나 조용한 세상을 더럽히는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복되다 일컬어져야 할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을 업신여기거나 광신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복음이 뜬소문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빌어주는 축복의 말을 아무도 원치 않는 이 시대가 과연 누구의 잘못인걸까. 마음이 굳고 귀가 열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탓일까.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수 탓일까.

세상을 향해 복된 소식을 전하고 세상을 축복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복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세상의 가쉽거리가 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전체 기독교를 망치고 더럽힌다고들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 하나하나, 모두가 세상이 부러워하고 경탄할만한 복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세상이 복음을 듣지 않는다고 한탄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가 복음을 전할만한 모습을 갖추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되돌아봄은 아쉬운 것을 구하기 위해 간구 전 회개때나, 성찬식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전도인 그리스도인으로 매순간마다 해야할 마음가짐과 몸단장이다.

2007/07/31 14:32 2007/07/31 14:32

창세기 46장 [열기]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이스라엘은 당장 짐을 싸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가나안 지역은 먹고 살기도 힘든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던데다가 죽은 줄 알았던 가장 아끼던 아들이 살아있고 또 아비를 부르고 있다 하니 아니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떠나가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편하기만 할리는 없었다. 그런 불편한 마음과 더불어 오래 정착해있어 머물러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있다가 길을 떠나려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고 아버지의 하나님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그 자신의 하나님이시기도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내려가는 도중에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예전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시며 이스라엘을 달래셨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 근심이 없을 수 없으며,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염려가 없을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고, 결과에 대해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무엇에게든 의지하고 싶어한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부모처럼, 형제처럼, 멘토처럼 다독여주고 감싸 안아준다. 난 언제나 네 편이다, 라고 속삭여주신다. 이럴진대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랴. 이스라엘은 씩씩하게 그의 아들을 보러 발걸음을 옮긴다.

언약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브라함때부터 이방인가 피를 섞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던가 가나안 땅을 그 이삭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경솔하게도 그들은 가나안의 여인들과 혼인하고 아이들을 만들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민족이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굽에 내려와봐야 문제는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강대한 애굽에 동화되고 흡수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을 꾸는 요셉은 한가지 방책을 마련했다. 일반인이 애굽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요셉이기에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요셉의 가족이지만, 요셉은 그 가족의 거주지를 고센으로 제한시키고 목축을 계속 하도록 하였다. 애굽 사람들이 목축하는 자를 업수이 여기고 상대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 총리의 가족이 목축을 한다는 것은 총리 자신의 지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테지만, 요셉에게는 총리의 지위보다 이방과 섞이지 않는 하나님의 민족인 자신과 그 가족의 위치가 더 중요했다. 애굽 여인과 혼인하여 민족의 피를 더럽힌 그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순결하게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그릇되기 쉽상이고 우리는 점점 어두운 길로 나아가려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어긋난 선택 후에 그 잘못된 갈림길을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가 하는 것이다. 잘못된 길을 들어가면 조금 빙 돌아가더라도 바른 길을 다시 찾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끼어들기를 하지 못해 부산까지 가게 되버리는 초보 운전자가 아닌 한 우리는 언제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된다.

2007/07/30 13:28 2007/07/30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