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7년 08월 03일 [一日一章] 50. 요셉의 죽음
  2. 2007년 08월 02일 [一日一章] 49. 야곱의 축복
  3. 2007년 08월 01일 [一日一章] 48. 열 두 손가락
  4. 2007년 07월 31일 [一日一章] 47. 증거자
  5. 2007년 07월 30일 [一日一章] 46. 애굽으로...
  6. 2007년 07월 29일 [一日一章] 45. 형제들의 화해
  7. 2007년 07월 28일 [一日一章] 44. 유다의 회복
  8. 2007년 07월 27일 [一日一章] 43. 은혜의 조건
  9. 2007년 07월 26일 [一日一章] 42. 용서의 조건
  10. 2007년 07월 25일 [一日一章] 41. 준비

창세기 50장 [열기]



이스라엘이 죽자 요셉은 그 형제들과 함께 장사를 지내기 위해 가나안의 막벨라 굴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때에 애굽의 주요 인사와 원로들이 함께 올라가는 것이었다. 총리의 아버지이니 각계의 인사들이 문상을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지금처럼 인근 병원에서 상을 치르는 것이 아닌 시대이니 가나안까지 같이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자리에서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히브리인이고, 업신여기는 목축하는 이를 이리도 높이는 것은 그만큼 요셉이 애굽에 끼친 영향이 크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온 후 보여준 모습이 훌륭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상 이스라엘이 죽자 몸이 다는 것은 요셉의 형제들이었다. 여태까지는 아버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셉이 함부로 할래야 할 수가 없었을테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제는 요셉을 막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아닌가. 그리하여 형제들은 아직 슬픔에 잠겨있는 요셉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셉은 이미 형제들에게 그 정체를 드러냈을때에 그들을 용서하였었다. 그들에게 복수할 권력도 이유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운 요셉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지금에 와서도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창세기를 가로지르는 가르침이 이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하나님의 마음을 베푸는 것, 하나님의 계획 안에 그 자신을 밀어넣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위해 정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셉의 삶이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고 성경은 요셉의 삶을 통해 창세기의 주제를 말씀하시며 그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를 마무리한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약속을 배우고, 신실하심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 사람의 나약함과 악함과 이기심과 욕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후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것이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생을 통해 이뤄내어야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성경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것임을 이제 알 수 있다. 이제, 그 역사를 짚어보며 함께 그 삶을 살아내보자.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08 3, 2007 17:45 08 3, 20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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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장 [열기]



이스라엘은 그와 함께 살지 않았던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 후, 마지막 때에 그의 열 두 아들들을 축복한다. 이 축복은 중동지방,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보았을때에는 상당히 의아스러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장자권을 받게 된 유다와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좋은 것으로 가득 복을 빌어주면서 시므온과 레위에 이르러서는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성경은 각자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하다.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백만원씩 버는 우리의 형편이 고달프다고 한탄하기 일쑤다. 언제나 자신의 일이 가장 힘들고, 자신의 형편이 가장 어렵다. 기준은 언제나 자신이지만, 기준 자체가 밑바닥 기준이라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데다가, 우리는 위를 볼 줄만 알지, 밑을 보며 반성할 줄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과 여건은 각자의 분량대로 나눠 주신 것이다. 먹고 살만큼, 쓸 수 있는 만큼 부를 주신다. 일을 할 수 있을만큼 능력을 주시며, 일을 주신다. 우리가 불평인 것은 우리의 분량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평만 하지 말고, 받은 것에 순응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야곱의 축복을 통해 성경은 말씀하신다.

누구나 유다가 받은 복을 원하며, 요셉의 복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레위가 되어야 하며, 누군가는 납달리가 되어야 한다. 단이 있으므로 아셀이 있고, 잇사갈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 유다의 복을 받으면 왕은 많겠지만, 제사장은 누가 한단 말인가.

자신을 알고 그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태엽 안에서 바른 톱니가 되는 것. 그것이 야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의 유언이 축복인 이유이다.

08 2, 2007 17:08 08 2, 200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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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8장 [열기]



열 손가락 중에 안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서도 실상은 열 손가락 중 더 자주 쓰거나, 더 이쁘거나, 더 마음이 가는 손가락은 있는 법이다. 다 똑같이 배아파 낳은 자식일진대 누구가 더 귀하고 누구가 덜 귀한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냐지만, 그런 것도 있다.

이 이야기는 요셉을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나이가 많아 죽을때가 가까워오자 요셉이 그 아들들을 데리고 문병을 온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상기하며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도 그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다. 어쩌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나 자신의 장자가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어짐이 캐낼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일평생 에서를 인하여,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인하여, 라헬을 인하여, 그리고 요셉을 인하여 마음 고생만 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 그의 생애를 통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반드시 그 민족이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일부분 예언적인 성격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아들로 넣어 가나안으로 올라가 땅을 나눠가질 때에 요셉의 후손이 땅을 더 많이 갖게 되리라고 한다. 요셉에 대한 지극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며, 서투르게 판단해서도 안될 일이다. 성경을 해석할때에는 자의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요령있게 돌려 맞춰도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거나 쓰임을 받는 사람은 있다. 비단 범한 죄가 커서 받을 은혜가 큰 경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더 적극적이고 더 애교 넘치는 사랑을 보내는 사람도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짝사랑을 마음 깊숙이 갈무리한채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사람보다는 꽃과 선물을 보내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쪽이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동시에 수억경의 생명체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하나님에게도 조금은 더 눈에 뜨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되돌려드리는 사랑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베드로처럼 더 적극적인 경우에 더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칭찬할 거리가 있어야 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있는지 어떤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만,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싶다.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08 1, 2007 16:23 08 1, 200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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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7장 [열기]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요셉에 의해 바로 앞으로 불려나간다. 바로를 대면한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자기의 생애 이야기를 통해 간략하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바로를 축복한다. 이미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바로는 자신이 좋게 여기는 요셉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축복 또한 좋게 받아들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모든 종교와 사회 현상을 통털어, 전능자에게서 구원을 거저받는 하나님의 소식만큼 크고 기쁘고 즐거운 것은 없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행도 훈련도 댓가도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것, 그 뿐이다. 이것보다 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더 빠르게 얻는 길도 없다. 그야말로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이 복된 소식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고 시끄러운 쇳소리로 여기거나 조용한 세상을 더럽히는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복되다 일컬어져야 할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을 업신여기거나 광신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복음이 뜬소문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빌어주는 축복의 말을 아무도 원치 않는 이 시대가 과연 누구의 잘못인걸까. 마음이 굳고 귀가 열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탓일까.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수 탓일까.

세상을 향해 복된 소식을 전하고 세상을 축복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복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세상의 가쉽거리가 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전체 기독교를 망치고 더럽힌다고들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 하나하나, 모두가 세상이 부러워하고 경탄할만한 복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세상이 복음을 듣지 않는다고 한탄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가 복음을 전할만한 모습을 갖추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되돌아봄은 아쉬운 것을 구하기 위해 간구 전 회개때나, 성찬식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전도인 그리스도인으로 매순간마다 해야할 마음가짐과 몸단장이다.

07 31, 2007 14:32 07 31, 200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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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6장 [열기]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이스라엘은 당장 짐을 싸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가나안 지역은 먹고 살기도 힘든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던데다가 죽은 줄 알았던 가장 아끼던 아들이 살아있고 또 아비를 부르고 있다 하니 아니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떠나가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편하기만 할리는 없었다. 그런 불편한 마음과 더불어 오래 정착해있어 머물러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있다가 길을 떠나려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고 아버지의 하나님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그 자신의 하나님이시기도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내려가는 도중에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예전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시며 이스라엘을 달래셨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 근심이 없을 수 없으며,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염려가 없을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고, 결과에 대해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무엇에게든 의지하고 싶어한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부모처럼, 형제처럼, 멘토처럼 다독여주고 감싸 안아준다. 난 언제나 네 편이다, 라고 속삭여주신다. 이럴진대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랴. 이스라엘은 씩씩하게 그의 아들을 보러 발걸음을 옮긴다.

언약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브라함때부터 이방인가 피를 섞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던가 가나안 땅을 그 이삭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경솔하게도 그들은 가나안의 여인들과 혼인하고 아이들을 만들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민족이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굽에 내려와봐야 문제는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강대한 애굽에 동화되고 흡수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을 꾸는 요셉은 한가지 방책을 마련했다. 일반인이 애굽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요셉이기에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요셉의 가족이지만, 요셉은 그 가족의 거주지를 고센으로 제한시키고 목축을 계속 하도록 하였다. 애굽 사람들이 목축하는 자를 업수이 여기고 상대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 총리의 가족이 목축을 한다는 것은 총리 자신의 지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테지만, 요셉에게는 총리의 지위보다 이방과 섞이지 않는 하나님의 민족인 자신과 그 가족의 위치가 더 중요했다. 애굽 여인과 혼인하여 민족의 피를 더럽힌 그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순결하게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그릇되기 쉽상이고 우리는 점점 어두운 길로 나아가려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어긋난 선택 후에 그 잘못된 갈림길을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가 하는 것이다. 잘못된 길을 들어가면 조금 빙 돌아가더라도 바른 길을 다시 찾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끼어들기를 하지 못해 부산까지 가게 되버리는 초보 운전자가 아닌 한 우리는 언제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된다.

07 30, 2007 13:28 07 30, 20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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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장 [열기]



유다의 고백을 듣던 요셉은 형들의 달라진 모습에 감동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그러면서 그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수준의 것이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이스라엘의 적통은 유다에게로 흐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요셉의 생애에 대해 이처럼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모든 고난과 경험들이 자신을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즉 그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자신은 그 일부분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들을 알고 있는 지금의 우리조차도 그들처럼 쉽게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삶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면서 사람 또한 만들어가신다. 그의 계획을 이루는데에 수월하게 사람을 조종하고 편의에 맞게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을 향해 능동적인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가신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들 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깨닫고 이후의 삶에 적용시켜나가지 못한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보다는 이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빽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적 지위나 부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쪽이 더 쉽고, 더 먹음직스럽고, 더 향기롭다. 알다시피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혹과 감정과 쾌락에 너무 약하다.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 내달리는 우리의 영혼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기 위해 고난을 주시거나 시험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고를 사단의 못된 꼬임이라 생각하여 그저 지나가기만을 위해 기도하거나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좌절하고 넘어져 도망쳐버리기 일쑤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참 당황스러울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의 삶에 불필요한 일이나 쓸데없는 사건 따위는 없다. 모든 일은 자신의 삶에 의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한 인과와 하나님의 배려들로 가득 차 있다. 어려운 짐의 무게에 눌려 좌절하고 넘어지는 것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기대하며 현재에 걸어가야하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것이 더 좋다. 절망금지.
07 29, 2007 12:45 07 29, 200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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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4장 [열기]



요셉은 마지막으로 그 형들을 시험하고, 또 곯려주기 위해 계략을 짰다. 그리고 그 형들은 기가막히게 걸려들어, 베냐민과 함께 요셉의 집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적당히 눈치 좀 채줘라 하는 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형제들의 재회의 감동을 더 높이고, 유다를 장자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쉽사리 일이 풀리게 하지 않으셨다.

요셉의 앞에 선 형제들 중에서 앞으로 나선 것은 유다였다.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앞으로 나선 것은 물론 베냐민 때문이었다. 아비를 걱정하는 마음은 한결같겠지만, 애굽으로 내려오기 직전에 베냐민의 목숨을 담보한 것이 유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것으로 이스라엘이 유다를 장자처럼 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에서의 장자권을 얻은 이스라엘로서는 반드시 첫째가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그리 뚜렷하지 않았을 수 있다. 게다가 첫째라는 녀석이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아버지가 아끼는 동생을 잃고 오는 둥, 여러가지로 신망이 떨어져버렸고, 둘째와 셋째는 주변 부족들에게서 그 가족을 위태하게 만들어서 위험한 녀석들로 찍혀버린터였다. 비록 자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은 유다이긴 하지만,
유다의 다짐에 베냐민을 보내어준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나마 그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기가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했다. 바야흐로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 줄기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방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여 혼인을 맺은 보아스, 잘못에 대한 즉각적인 회개와 돌이킨 후에 다시 같은 죄를 짓지 않은 다윗,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회개와 희생에 적극적인 유다에게서 시작한 위대한 피의 흐름이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하는 일이 많다. 회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상처가 나면 벌어진 채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싸매고 약을 바르고 서늘하게 두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아물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빠르고 흔적없이 아무는 것이다. 유다의 모습은 죄에 물든 우리가 받을 모습이다. 언젠가는 아물겠지 하고 상처를 그냥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07 28, 2007 17:40 07 28, 200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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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3장 [열기]



시므온을 담보로 하여 받아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이스라엘은 아들들에게
양식을 더 사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셉을 경험했던 아들들은 애굽의 총리가 두려워 베냐민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양식도 떨어졌고, 이제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되자 이스라엘은 자식을 잃으면 잃게 되리라고 결단을 내린다.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애굽으로 내려간 열 형제는 바로 요셉의 집으로 옮기워진다. 비록 그들이 자처한 일은 아니지만, 이전에 왔다간 일로 찔리는 것이 있는지라 불안불안해하던 형제들은 요셉의 집사에게 돈에 대해 실토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집사는 그 돈은 그들의 것이라고 말해준다. 도대체 무슨 돈을 이미 받았다는 것인지, 어째서 돈도 받지 않고 양식을 준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들로서는 답답한 일들 투성이었다. 거기에 함께 식사하기로 한 자리에서 그들의 자리는 나이 순서대로인 것이 아닌가. 애굽에는 무언가 신비로운 일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므온을 무사히 만난 기쁨과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하는 불안에 쌓인 채, 요셉의 형제들은 간만에 본 진수성찬을 요셉과 함께 즐겼다.


은혜란 어떤 것일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긴 한데, 언제 주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시기가 따로 있으신걸까, 혹은 상황이 따로 있는 것일까. 자격이 있거나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에 기도 한시간이라든가 십일조 3회 연속이라든가 전도 세 명당 은혜 한번이라든가...

은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이고 시공간 초월적인 선물이다. 사람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 내용에 제한이 없는, 쉴 틈도 없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고, 지금도 주어지고, 앞으로 주어질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생활에 포함된 것들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에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던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던가, 걸어다니는 매커니즘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들은 한시도 우리에게서 떠나있지 않는 것들이다. 은혜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리에게 늘 주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끔 우리가 정말 은혜받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하거나 어떤 류의 돌보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할때에, 생각지도 못한 피드백이 왔을 때에, 혹은 얼토당토않는 일이 벌어졌을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다. 이것이 은혜의 조건이다. 하나님쪽에서 볼때는 은혜는 전혀 - 물론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조건은 빼고 -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나약함, 굶주림, 육체적 고통, 실패, 두려움, 약탈, 거짓 등등.

이스라엘은 베냐민과 다른 형제들을 무사히 돌려받는 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형제들은 그들이 되돌려 받은 돈으로 인해 걱정하고, 식사자리에서 장유차서대로 앉혀진데에 두려워하고, 무사히 돌아갈 것을 염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요셉은 그 형제들과 원만히 화해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 각자의 평소 생활에서 뿌리깊게 내려져 있던 은혜가 있음에도 알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평소와 다른 처지에 속하게 되니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구하는 것을 얻게 되는 일이나, 혹은 모습이 다를지라도 받게 되는 기도의 응답만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은혜 역시 그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기로 한 모든 삶이 은혜의 연속이다. 새삼스럽게 구하거나 기뻐할 것도 없이 늘 우리에게 각자의 분량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잘못된 간구와 은혜의 바람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전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삶의 매순간순간을 기뻐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조건에 얽매이지 말자. 하나님을 제한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둬두지 말자.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워있고, 은혜는 삶에 넘쳐흘러 타인에게, 타인에게로 흘러간다. 이러한 삶을 인정하고 기뻐함으로써 우리는 기적에 목말라하고, 감정에 좌우되며 세상에게 질타되는 우물속의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07 27, 2007 12:01 07 27, 20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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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2장 [열기]



기근이 애굽의 인접 지역으로 퍼져나가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애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곱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야곱은 그 열 아들을 보내어 곡식을 구하게 했다.
하지만, 라헬의 두 아들들 중 남은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다.
오랜 세월 큰 어려움없이 살아와 안전한 신앙에 갇힌 야곱에게는
베냐민을 혹여 죽을지 모르는 긴 여행에 동참시킬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첫사랑인 라헬의 막내 아들이지 않은가.

풍년때에 곡식을 모으는 일과는 다르게
흉년의 곡식 판매는 무척 바쁜 일이었다.
요셉은 아마도 조금 한가해지면 가나안의 가족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오랜 기간 인내와 용서를 배워왔고, 가정을 이루며 분노를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처럼 여유가 나지 않았기에 애굽을 치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형들이 먼저 그를 찾아왔다.
어쩌면 그들은 여행길이나 애굽에서 요셉을 만날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족속의 상인들 중에 있거나 애굽에서 다시 팔렸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설마 애굽의 궁정에, 혹은 애굽의 관리 중에 그 형제가 있을거라고 누가 상상했으랴.
덕분에, 그리고 많이 변한 모습에 요셉은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요셉을 향해 엎드린 그 형들의 모습에서
요셉은 자신이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인 꿈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막바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마지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용서는 억울한 한쪽의 일방적인 베품이지만
한쪽만의 준비나 마음먹기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용서를 하는 쪽도, 받는 쪽도 모두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기 원했다면 아마 찾기는 쉬웠을 것이다.
히브리 노예 청년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루머와 스캔들이 있었을까.
이스마엘 상인들에 의해서 이야기가 각국으로 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의 총리가 가족이나 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직 그들은 용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한다.
자신을 잃은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요셉을 버리던 형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알게 해주기 위해,
그리고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용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시므온을 가두고 형제를 보내어준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살아간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간다.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피 흘리심을 인하여
우리의 조건에 관계없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를 받기에 합당한가하는 얘기는 또 다르다.

우리는 용서를 받을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같은 죄를 두번 다시 짓지 않으며, 우리의 잘못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죄를 인하여 슬퍼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베풀어지는 용서는 거름망처럼 다 통과해 빠져나갈 뿐이다.
무미건조한 습관적인 용서가 될 뿐이다.

주문처럼 읊조리는 감사와 용서의 기도가 되기 보다
먼저 우리를 돌아보아 용서를 받을만한 모습과 마음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07 26, 2007 12:56 07 26, 200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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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一章] 41. 준비

from 천국의 꿈 07 25, 2007 12:28

창세기 41장 [열기]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컸던지,
관원장 사건 이후 2년 동안이나 요셉은 옥에 더 갇혀 있었다.
그 청춘의 긴 시간동안 요셉은
인내를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지혜를 배우며 준비되어갔다.

그 결과 노예보다 못한 죄인이었던 이 히브리 청년은
애굽의 왕 앞에서 당당하게 그 꿈을 풀이하고
해결책을 내놓았으며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리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계획을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는 유년부터 청년의 시기에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남자가 2년간 군대에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 일견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 쓸데없는 일에 낭비를 한다.
스스로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인생을 스케쥴링하며
최선의 선택이라고 그릇 판단하고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가기도 한다.

고백컨데, 청년시절의 많은 선택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많은 선택들이 잘못 판단된 것이었다.
어설픈 지식과 판단으로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준비되지 못한 채 출발선을 통과한 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준비되어진 자의 형통함을 보여주신다.
청년 시절을 많은 쾌락과 육신의 평안과 재물을 위해 소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준비되어지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알려주신다.

이 준비라는 것은 비단 신앙적인 부분에서 그치지 않는다.
요셉은 기근을 이기기 위한 제도적이고 법률적인 장치를 완벽하게 제안했다.
든든한 신앙적 기초 위에 세워진 견고한 지식과 지혜의 기둥.
이것이 청년들의 준비이다.


하지만 준비되어진 자의 결과는 명예와 재물과 쾌락에 있지 않다.
요셉처럼 명예와 부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준비되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데에 사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요셉이 그 많은 시련을 통해 얻게 된 것은 총리라는 직책과 재물과 가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화해와 용서를 배우고, 애굽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우리의 준비가 그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하여
헛되다거나 중단해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그것을 위해 준비되어져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하는 것이
크리스쳔 청년의 사명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준비되지 못한 자를 뜻밖에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시지만,
준비되어진 자를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임을 기억하자.

07 25, 2007 12:28 07 25, 200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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