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도미니크 보비의 유명한 작품으로 "잠수복과 나비"가 있다. 유명 패션잡지인 엘르(Elle)의 편집장으로 잘나가던 그는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졌다가 의식을 회복했지만, 그 의식이 왼쪽 눈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없는 몸에 갇혀버린 록트-인-신드롬(Locked-in Syndrome)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왼쪽 눈의 깜빡임만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15개월여에 걸쳐 "잠수복과 나비"를 쓰고 갇혀버린 몸을 떠났다.
그리고 이 장-도의 일화와 책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잠수종과 나비"이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이 영화를 철저하게 장-도의 시각에서 접근했다. 카메라가 장-도의 왼쪽 눈이 되어 그의 시점에서 그가 바라보고 느꼈던 세상을 보여주며, 그 왼쪽 눈 안의 의식이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를 알려준다.
난 "잠수복과 나비"를 읽어본 적은 없다. 다만 익히 알려져있는 그 책에 대한 일화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듣고 볼 수 있지만,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알파벳 한글자씩을 눈으로 알려주고, 그것을 단어로, 또 문장으로,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것일까. 상상할 수 없었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칭 폐쇄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난 갇혀있는 느낌을 굉장히 싫어한다. 특이하게 폐쇄적인 공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던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던가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고작 4주의 훈련소 입소 기간 중에 약 2주를 창고로 사용하던 내무실에서 지냈는데, 일반 내무실이 아니라 침낭에서 자야 했다. 정말로, 당시 내게 가장 좋았던 것은 불침번을 서는 일이었다. 침낭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을 참아내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지금도 이따금 지하철 좌석에서 옆 사람들에 의해 꽉 끼어 팔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흡사 공황장애를 일으킬만큼의 공포감이 밀려오곤 한다.
그런데다가 글을 읽을 때 감정이입도 쉽게 되는 내가 어떻게 그런 글을 읽을 수 있으랴.
그러다가 책보다 먼저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알려진 그의 이야기나 작품의 특성상 무겁고 슬픈 영화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영화는 담담하다. 장-도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좌절과 후회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과 유머, 해학을 보여준다. 병의 특성상 나레이션은 관객이 아닌 자신에게 향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정적인 이야기도 감정이 극도로 치닫는 형식이 아닌 일관된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때때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동일한 병을 겪고 있지만, 보다 발전된 기술의 힘을 빌려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마르탱과 지극히 단순한 알파벳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장-도. 신체에 묶이지 않은 그들의 정신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자유로웠던 것일까.
장-도는 발병되기 전에 거동할 수 없는 아버지를 찾아 효도를 했다고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병에 걸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울지 말라는 장-도의 전언에 아버지는 어떻게 아들이 아픈데 울지 않을 수 있냐고 하며, 그의 생일에 어린 시절 사진을 깜짝 선물이라며 보낸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위안이 되고 후회가 되며 기념이 된다. 그러므로 되도록이면 많은 기억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비록 많은 부분은 잊혀지고 떠오르지 않겠지만, 남은 기억들은 언젠가 당신을 울리고 웃게 할테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도와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고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우리, 누가 더 자유로울까. 갇히고 억압받고 기회와 공간을 빼앗긴다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 좌절과 실패를 겪은 후에 무기력하게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인가. 보기에 정상이 아니라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욕망이 무시되어도 되는 것인가.
영화는 밝은 분위기에서 매력적인 마티유 아말렉의 목소리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를 보며 어두운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