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7장 [열기]



하나님께서는 돈을 지불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으신다. 짐승을 잡아먹지도 않으신다. 부릴 종을 구입하지도 않으시고, 집을 지을 자재를 구하지도 않으신다. 옷을 지을 실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시고, 저축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도, 생명도,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차례 그에게 드리는 예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속죄제와 화목제를 비롯한 각종 제사와 절기를 위한 제물들, 십일조나 서원제물같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들, 집이나 땅, 사람등 각종 성물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에게도 무언가 하나쯤은 내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을 할때에는 서로 예물을 주고받는다. 서양에서는 결혼식장에서 교환하는 반지 하나로 끝내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함지아비가 지고가야 할 정도로 예물이 가득 담긴 함을 보내기도 하고, 혼수라는 이름으로 살림살이 이외의 것들도 잔뜩 구입하기도 한다. 허례허식도 많고, 불필요한 것들도 많고, 마음보다 물질을 먼저 보는 풍조를 조장하기도 하지만, 예물은 본래 상대에 대한 예의와 베푸는 마음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은 것처럼,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우리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달라고 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 분은 무엇이든 만들어내시며, 무엇이든 이미 가지고 계신 분이고,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 아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타락하고, 원죄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각종 제사와 예물을 통해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게 만드셨다. 하지만 그들은 늘 딴청을 피우고, 눈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받으셨다. 이러한 규칙과 절기를 통해 그들의 눈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사람이 귀히 여기는 물질을 드림으로 물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형식과 물질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붙들어둘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엄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들에서, 우리는 더 깊고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기지 못하여 그들이 바람피지 못하도록 얽매고, 가두어두며, 으름장을 놓는 하나님의 강한 사랑과 용서하고, 소망을 함께 바라보며, 함께 즐기기를 기대하는 애틋한 사랑의 모습. 레위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거할 소망을 이루어가는 울타리인 것이다.

10 9, 2007 13:45 10 9, 200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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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6장 [열기]



26장의 말씀은 예언적인 말씀인 듯 하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눈앞을 흐른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분열, 전쟁에서 패하고, 유린되고, 포로로 끌려가고, 모욕당하는 모습, 그 와중에도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선지자들과, 돌아온 포로들의 기쁨... 가나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모세의 기록이지만, 마치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된 듯한 생생한 경고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택하셨다고 그들을 무작정 감싸고 애지중지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오히려 엄한 목소리로 경고하신다. 사람이란 늘 잘못된 길로 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상보다 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말씀하신다. 칠배나 더 벌을 더하고, 거기에 칠배를, 또 칠배를 더 벌할 것이니 제발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가르쳐주신다. 물가에 어린애를 내보낸 아비 마냥 과장된 - 사실 전혀 과장되지 않았지만 - 엄포를 늘어놓으신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다고 우리에게 남은 계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은 늘 무언가 결과를 일으키고, 잘못된 행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은혜에 취해 잘못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엇나간다면 은혜가 끊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고 말 것이다. 마치 자신들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경고를 무시하면 현실로 나타나는 법이다. 사고 다발 지역이라는 경고가 있는 곳에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익사 위험이라는 경고가 있는 곳에는 익사 사고가 일어난다. 미끄럼 주의 경고판을 무시하면 미끄러져 사고가 나게 되고, 입산 금지 라인을 넘어가면 굴러 떨어지거나 추락하게 되고, 잔디를 밟지 마시오 를 무시하면 잔디가 밟혀 죽는다. 경고
를 현실화하지 않는 방법은 경고의 내용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 사고 다발 지역에서 안전운행, 익사 위험 지역에서 입수 금지, 입산 금지에서는 돌아내려가고, 잔디에는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친절하게 경고가 있는데 사고를 자처할 필요가 있을까.

죄에는 벌이 따른다. 이런 경고가 도처에 보인다. 너무 많아서 식상해졌는가. 그렇다면 머리를 비우고 다시 되새기자. 경고를 무시하지 말자. 죄에는 벌이 따른다.

10 8, 2007 17:51 10 8, 20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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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5장 [열기]



히브리인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세상적으로 보자면, 한 부자가 넓은 땅을 사서 그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일을 게을리하여 소출이 적어졌고, 어떤 자녀는 많아졌다. 그래서 적은 아이가 많은 아이에게 땅을 팔아 먹을 것을 얻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니 땅을 모두 잃은 아이도 있고, 형제의 종으로 사는 아이도 생겼다. 아비에게는 다 같은 자녀일진대, 형제들끼리 서로 사고파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이를데가 없다. 그래서 아비된 권한으로 형제들끼리의 거래를 다 무효화시켜준다. 땅을 모두 팔았던 아이는 다시 땅을 얻어서 좋고, 땅을 샀던 아이는 그 동안 재산을 많이 모아두었으니 좋다. 내것인데 왜 빼앗냐고 할 일이 아니다. 아비의 명령이고, 형제간의 일 아닌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얻은 것에 감사하고 족한, 너그러운 세상이다.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의 한 증거이다. 거저 얻은 것을 매매하는 일은 사실 옳지 못하다. 하지만 사람이 얽혀 살아가다보면 재물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종으로 팔리우기도 하는 법이다. 모두가 균등한 재산을 늘 유지하는 것은 공산주의에서도 실현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다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착화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을 선포하신다. 제사장의 뿔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빚과 얽매인 것이 풀어지는 것이다. 거저 주신 것을 그냥 내놓는, 감사의 해인 것이다.

희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며, 주신 것이 우리에게 넉넉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소유물에 집착해서는 안되고, 받은 것을 베풀 줄 알아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 세상의 많은 다툼과 사고는 재물로 인해 생기지 않던가. 하지만 하나님은 재물로 인해 다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해주신다. 우리의 손을 비우면 마음이 넉넉해진다고 하신다.

희년은 이론도 아니고, 말뿐인 유토피아도 아니다. 실제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인의 원리이다. 내 것이 진정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탐욕스럽게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이 되어야 한다.
10 7, 2007 15:03 10 7, 200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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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4장 [열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방인이다. 구약의 부르심을 직접 받지 않은 민족이거니와 히브리 족속 가운데에 거하지도 않는 완전한 이방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신 이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 전세계로 복음이 전파되게 한 이후 우리 모두 이방인이 아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만심과 민족우월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당시는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집트인이라면 아들 또한 이집트인일 것이다.그런데 아내를 너무 사랑했거나,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들을 보며 하나님을 믿게 되었거나, 이집트가 싫어서 떠나고 싶었거나, 어떤 이유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나선 이집트인들이 말씀에 나오는 이 가족 하나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속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사람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이집트인인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저주함으로 돌에 치여 죽는 형벌을 당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형벌이었다. 이집트인은 섬기는 신이 다를터이니, 당연히 다른 신을 향해 저주도 하고, 축복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 속에 거하기로 결심하면 그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율법에 따라야하는 것이다. 그의 뿌리가 히브리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 하여 엑기스인 구원은 받아먹고, 과육인 교회는 본뜨고, 겉껍질인 율법은 히브리인들에게 그대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슬로밋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를 믿는 믿음이 이익만을 취하고 손해는 감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더이상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것이다. 동일하신 하나님께는 우리 역시 저 시대의 그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10 6, 2007 15:55 10 6, 200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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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3장 [열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념일을 만난다. 생일, 결혼기념일, 만난지 100일, 200일... 저마다 각종 기념할만한 일들을 기억하며 한해가, 또는 일정 기간이 지남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 중에서 특별히 결혼기념일이나 교제기념일에는 특별한 선물을 하거나 즐길 거리를 누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다. 적어도 기념일에는 서로가 주인공이 되며,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간 위에 있었다.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가나안으로 집어넣는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기념으로 삼고 사람과 더불어 기뻐하고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기념일에 사람과 완전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 연인과 함께 기념일을 보내는 처녀의 마음처럼,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둘이 함께 있음만으로도 만족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음에 기뻐하며, 그 날만큼은 둘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는... 그러한 기념일이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념일에 노동을 금하셨다.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최대한 다른 곳에 눈을 돌리거나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시키셨다.

언제부터인가, 주일이면 어디로 놀러갈까 궁리하고, 부활절이 지나갔던가 아직 아니던가 하고 있다. 추수감사절이 특별하지 않고, 절기헌금을 내는 것도 잊는다. 매일매일이 하나님과의 기념일이 되어도 모자랄터인데, 일년에 몇 안되는 날들까지도 무덤덤하게 지나가고 있다. 마치 갱년기의 부부처럼.

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함께 보내지 않는 나를 보며,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아파 하셨을까. 화내고 혼내야지 했다가도 얼굴을 보면 다시 안아주시며, 꿰맨 가슴의 상처가 얼마나 많으실까. 똑같이 행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데도, 마치 매뉴얼을 보고 따라하는양, 그대로 답습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얼마나 밉고, 버리고 싶으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를 안아주시고, 웃어주시는 하나님을 난 알고 있다. 비록 내가 드리는 것이 작고, 그분과 보내는 시간이 적을지언정, 내가 돌아올때마다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다. 한없이 죄송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더욱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가기를, 하나님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고 노력할 뿐이다. 부디 그리 되기를...
10 5, 2007 15:27 10 5, 20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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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2장 [열기]



만약 아무 소나 양이나 제물로 드려도 되었다면 어땠을까? 예물을 아무나 먹어도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소유 중에 키우기 어려운 것이나 먹기도 힘든 병든 동물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가난하여 구걸하며 살아야하는 사람들이 성막으로 몰래 들어와 제사장의 음식을 먹어치우지 않았을까.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이지만, 사람의 본성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두기 원하신다. 우리의 삶이 온통 그분으로 채워지기 원하시고, 그분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 원하신다. 그것을 탐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성과 기꺼운 마음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자유로울 때에 인간은 꾀를 부리고 이기적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명령과 강요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마음가짐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옳지 않은 듯하다. 강제로 제물을 바치게 하고,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죄를 짓게 하시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법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높은 우선순위에 놓았을때의 기쁨을 알게 된다. 드리는 즐거움이 아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강제와 법규는 우리를 더 높은 수준에 머물게 해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강요를 정성을 다해 따르는 것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지만, 제사를 통해 순종함을 배울 수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하야 할 것이다.
10 4, 2007 15:03 10 4, 200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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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1장 [열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강도 높은 순결을 요구하신다. 시체와 부정한 짐승, 부정하게 된 갖가지 상황들이 그러하며, 부정했을 경우 취해야 될 것들이 그러하다. 그 중에서 특히 제사장에게는 더욱 수준이 높은데, 제사장은 처녀가 아닌 여인과 결혼할수도 없었고, 대제사장은 부모의 시체에도 손을 대어서는 안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은 대체로 정직한 사람의 일반적인 삶과 같아서, 노력해야하지만 누구나 살아낼 수 있는 삶이다. 하지만 가끔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평범함을 뛰어넘어,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실인의 삶이라던가, 제사장의 삶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만한 시험, 견뎌낼 수 있는 시험만 주시는 것처럼, 능히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힘들고 어려운 삶보다는 무난하게 묻혀가는 삶이 편하기에, 그리고 구원은 동일하기에 좀 더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죄의 연속인 삶에서 가능한한 죄에서 떨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 역시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히브리인의 사회에서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술먹으라 강요하는 직장 상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어리석다는 무신론자 동료들은 없었을테니까.

안전한 범위에서 그럭저럭 구원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어떨까. 영어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고, 여러가지 기술을 습득하려는 것처럼, 신앙의 생활에서도 자신을 갈고 닦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10 3, 2007 14:02 10 3, 20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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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0장 [열기]



요셉이 보디발의 집사로 있을 때에, 보디발은 그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요셉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의 아내까지 자동적으로 요셉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기에, 요셉은 그 아내의 유혹을 피했고,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셉이 바보인가? 요셉이 잘못 생각한걸까?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그 땅의 모든 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면 그 땅의 모든 것이 소유이니까, 그 문화까지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일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니까, 가나안에 가면 가나안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당연히 아니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내어 쫓으라고 명령하셨고, 이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문화와 관습을 없애버리라는 뜻이었다. 히브리인들이 받을 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과 사람이 만든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심지어 농작한 식물들까지도 세 해 동안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카톨릭에서는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하여, 자국의 문화를 일부분 유지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은 많은 비기독교 국가에서도 기독교가 쉽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비기독교 사람들에게도 거부감을 덜 일으킨다. 더불어 개신교의 독선적 배타성이 더 두드러지고, 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만 믿으면 만사 오케이인 것일까. 우상에게 절함으로 예수를 널리 전파하고, 작두타는 것을 통해 예수를 전하려는 것이 옳은 것일까.

기독교에도 절대적인 지침이 있고, 플러스/마이너스 알파가 있는 너그러운 지침도 있다. 이를테면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이웃에게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대라는 것은 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화상대주의에 의한 배타성 해제 요구는 절대적인 것의 덜 절대적인 것으로의 변경 요구이다. 어째서 예수만이 진리냐는 것이다. 어째서 조상에게 절하면 안되냐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받지 않았다. 우리가 거할 땅과, 전도의 대상들을 받았지만, 그 이방의 문화들까지 우리 안에 두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 권고도, 충고도 받지 못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임으로 당한 수천년에 걸친 고통을 우리는 읽고 보아왔다. 지금도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장자에서 내어쫓겨진 르우벤과 같은 유대인의 모습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을 교훈삼는 우리가 어찌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새 계명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너그럽고 쿨한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다. 가나안 땅의 모든 것이 이스라엘 자손의 것이 아니었듯, 세상의 모든 문화와 관습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다. 세상에 아부하지 말고 온전한 판단과 믿음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해야 할 것이다.
10 2, 2007 13:24 10 2, 200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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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장 [열기]



이스라엘 자손의 도덕적 잣대가 될 이 말씀들의 대부분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도덕적 기준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하는데, 인간 역시 천년이나 하루나 다를바가 없는 것 같다. 이 말씀이 세상에 놓여진 후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도덕 교과서나 많은 도덕적 지침서에 나올법한 이런 명령을 성경에서도 봐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매 명령의 끝마다 나오는 구절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양식이 세상과 특별히 다른 것은 몇가지 없다. 세상과 비슷한 수준의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비슷한 도덕 수준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 이유에서는 굉장히 넓은, 건너기 힘든 틈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과 가치의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려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를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살인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도둑질 하면 안되는 것도, 근친상간하면 안되는 것도, 부린 자의 급여를 떼먹으면 안되는 것도, 거짓말하면 안되는 것도, 이유없이 남을 미워하면 안되는 것도, 장애인을 업수이 여기면 안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남을 미워하면 안되는 것도, 무단횡단하면 안되는 것도, 사고내면 안되는 것도, 효도해야하는 것도,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것도......

세상에 대하여 순결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결하시고 정직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순결해야 하며, 거짓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슨 득이 되기 때문이거나 선교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CCC1 수련회의 마지막 집회때마다 하는 것이 있는데, 백문일답이라는 것이다.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인데, 처음에는 조금 뻘쭘하다가도 어느새 열중하게 되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단순히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일깨워준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관계의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고, 우리를 구원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고 체현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1. Campus Crusade for Christ [Back]
10 1, 2007 12:54 10 1, 200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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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8장 [열기]



히브리인들이 400여년을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으면서 보고 배운 것은 선진 문물이었다. 이집트는 당시 강대한 나라였고, 많은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곳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신과 신을 섬기는 방식을 볼 수 있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일들이 머리속에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도 생각해낼 수 있었고, 가나안 땅의 끔찍한 우상들도 별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장 뛰어난 창조물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오래 봐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 일도 알고 계셨다. 그들이 자극적이고 향락적인 우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앞에 절하고 음란과 타락에 몸을 바칠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하나님의 택한 족속조차도 일부다처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하는 행동을 보았을때 따라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을 들어갈 그들에게 경고하신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8촌 이하의 근친혼을 금지하고 있다. 8촌 이하의 혼인 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족보적으로도 복잡해지고, 유전적인 결함의 발생율도 높다. 그리고 대개 8촌 이하, 혹은 6촌 이하는 가까운 친척일 것이다. 요즘같은 햇가족 시대에도 그러하다면, 한 집에 여러 세대가 모여 살던 대가족 시대나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족장 시대는 오죽했으랴. 한 식구나 다름없을터인데 그들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제 부모, 혹은 제 자식을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상대를 가리지 않는 관계의 허용은 성적 문란함을 초래한다.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어린 시절에는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 이들이 성적으로 관계될 수 있다면 성에 관한 도덕적 관념이 희미해질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는 성관계를 맺는 상대에 대한 사회적 관계의 연결이 약해질 것이다. 말하자면, 아무나 맘에 들면 같이 잔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제나 사회적, 문화적 충동의 자제를 포함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쾌락과 즐거움을 하나님없이 더 많이 누리기 위해 금기를 깨고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만들어버린다. 하나님의 속성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고, 모든 즐거움의 근원이지만, 그 안에 모든 행위와 상황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 알맞는 상황과 능력을 주신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충분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아드레날린의 중독성 고통을 맛보기 위해 굳이 절제를 벗어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기에 세련되고 쿨해보이는 선진문화를 동경할 필요도 없고, 원색적이고 향락적인 저질 문화를 답습할 필요도 없다. 이집트 문화도, 가나안 문화도 히브리인들에게는 강건너의 불이 되어야 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실수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당신의 즐거움이 내게 족하다고.
09 30, 2007 12:12 09 30, 200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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