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흥행과 발전된 CG 기술의 바람을 타고 수많은 판타지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중에서 일부만 개봉이 되고 있다(아더와 미니모어의 경우처럼 뒤늦게 개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는 위의 영화 이외에는 많지 않은 듯 하다. 원작가들의 인연에 의해 반지의 제왕을 엮어 홍보했던 나니아 연대기의 경우에도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한 듯 하고, 오히려 문 프린세스처럼 듣보잡 계열의 영화가 더 많은 편이다. 물론 매니아들에게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 역시 판타지를 좋아하지만 편식을 하는 편이라 그다지 많은 영화를 접하지는 못했는데, 그간 판타지같지 않은 판타지라는 얘기를 들었던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뒤늦게 보게 되었다. 결과는 역시 판타지를 본 느낌이 아니라 흡사 "라이언 일병 구하기" 나 "작전명 발키리"를 본듯한 느낌이다. 15세 관람가라고는 하지만, 타겟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

때는 1940년대, 스페인 내전 후 잔당을 소탕하고 있는 부대에 오필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와 도착한다. 새아버지가 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임신중인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데려오기 때문인데, 부대로 가는 도중 오필리아는 요정을 만난(다고 생각한)다. 군대의 환경과 새아버지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필리아는 어느 밤, 요정을 따라 판을 만나게 되고 판에게서 자신이 요정 세계의 공주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요정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몇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도.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판의 지시에 따라 문제들을 해결하고 마침내 판의 앞에 선 오필리아이지만, 동생의 피가 필요하다는 판의 말에 그녀는 요정 세계를 포기하는데...

아마도 배급사의 홍보도 위와 비슷했을 것이라 본다. 해리포터와 비슷한 가정(사회)부적응 소년소녀의 현실 탈출 판타지로 가장해서 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하지 않았을까. 해리포터 시리즈조차도 점점 무거워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즐겁게 아이의 손을 잡고 이 영화를 보러 간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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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모습을 한 판. 그러나 악마와 더 흡사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동화가 가혹한 현실에서 위안이 될 수 없다고 계속해서 말해준다. 오필리아는 요정을 보고 마법을 보고 다른 세계를 보지만, 어머니는, 스파이는, 새아버지인 대위는 마법따윈 없다고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필리아는 판의 지시를 - 비록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리고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보여주는 판의 세계는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필리아의 상상일까.

보통 판타지는 대상이 어떠하던간에 현실이 가혹할수록 상상의 세계는 따뜻하다. 상상의 세계조차 현실과 다르면 무엇하러 상상할까. 언제나 상상의 세계는 결국 사우론이 패하고, 해리가 아니라 볼드모트가 죽고, 아스란이 승리하는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현실만큼 판의 세계도 어둡다. 우리편인지 저쪽편 괴물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은 판의 외모 뿐만이 아니라 그의 태도 또한 우리로 하여금 과연 오필리아가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제대로 된 이야기인지 의심하게 하고, 오필리아가 혹시 제정신이 아닌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하고, 영화의 장르를 잘못 안 것은 아닌지 확인하게 한다. 결국 해피엔딩일거야 라는 기대조차 품을 수 없을만큼 밀어붙힌다.

결국 오필리아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심성 덕분에 요정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지만, 영화는 요정 세계에서의 오필리아와 함께, 현실에서 피를 흘리는 오필리아도 보여준다. 사후 세계에서의, 혹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현실에서의 상황을 견뎌내고 주어진 임무들을 해결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영혼의 세계는 허상이며 결국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의 선택을 관객에게 맡기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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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Pan's Labyrinth / El laberinto del fauno


2009/12/28 17:27 2009/12/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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