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8장 [열기]



열 손가락 중에 안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서도 실상은 열 손가락 중 더 자주 쓰거나, 더 이쁘거나, 더 마음이 가는 손가락은 있는 법이다. 다 똑같이 배아파 낳은 자식일진대 누구가 더 귀하고 누구가 덜 귀한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냐지만, 그런 것도 있다.

이 이야기는 요셉을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나이가 많아 죽을때가 가까워오자 요셉이 그 아들들을 데리고 문병을 온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상기하며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도 그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다. 어쩌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나 자신의 장자가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어짐이 캐낼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일평생 에서를 인하여,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인하여, 라헬을 인하여, 그리고 요셉을 인하여 마음 고생만 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 그의 생애를 통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반드시 그 민족이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일부분 예언적인 성격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아들로 넣어 가나안으로 올라가 땅을 나눠가질 때에 요셉의 후손이 땅을 더 많이 갖게 되리라고 한다. 요셉에 대한 지극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며, 서투르게 판단해서도 안될 일이다. 성경을 해석할때에는 자의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요령있게 돌려 맞춰도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거나 쓰임을 받는 사람은 있다. 비단 범한 죄가 커서 받을 은혜가 큰 경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더 적극적이고 더 애교 넘치는 사랑을 보내는 사람도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짝사랑을 마음 깊숙이 갈무리한채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사람보다는 꽃과 선물을 보내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쪽이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동시에 수억경의 생명체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하나님에게도 조금은 더 눈에 뜨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되돌려드리는 사랑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베드로처럼 더 적극적인 경우에 더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칭찬할 거리가 있어야 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있는지 어떤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만,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뻐보이는 손가락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싶다.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2007/08/01 16:23 2007/08/0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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